[미스터리 수사반] 혼선 : 꽃이 피지 않는 마을 ep.2
※ 읽기 전에
- 이 글은 잠뜰TV의 컨텐츠 '미스터리 수사반'의 2차 창작 소설입니다. 모든 내용은 픽션이며 실제 인물, 단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 살인, 사고, 부상 등 다소 자극적이고 잔인한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첫 장편 소설인 만큼 미흡한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점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땡큐
- 잠뜰TV 구독과 좋아요
혼선
1. 전신ㆍ전화ㆍ무선 통신 따위에서, 선이 닿거나 전파가 뒤섞여 통신이 엉클어지는 일.
2. 말이나 일 따위를 서로 다르게 파악하여 혼란이 생김
3. 줄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뒤섞임. 또는 그 줄.
─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 D-3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10시 48분
- 수현 경사, 라더 경장, 공룡 경장, 덕개 경장 / 사건 현장 근처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네. 살펴 가세요."
자리를 떠나는 두송을 보며 수현이 가볍게 배웅했다. 사건 현장엔 죽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역 순경과 제 선배들을 기다리는 형사들만이 남았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거치곤 너무 조용하지?" 순경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수현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졌다. 마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의 호박색 눈은 그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골 마을도 그저 사람이 사는 장소의 한 모습일 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같다. 전혀 환상적일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작은 동네라서 그런 거 아녜요?"
"작은 동네니까 더 난리가 났을 수도 있지. 봐바, 여기 들어오고 나서 사람은 한 명밖에 못 봤잖아."
"에이, 다들 집에 계신가 보죠~."
공룡은 대수롭지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지만, 라더는 수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사람이라곤 다리 건너기 전, 저편에서 형사들을 힐끗 보고는 그냥 가버린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다였다.
"저... 숫자들은 뭐인 거 같아요?" 정적을 깬 건 덕개였다. 등을 보여주며 엎어져 있는 누군가의 마지막이 줄곧 신경 쓰였는지,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890...9339? 무슨 삐삐 암호 같은 걸까?"
"전 삐삐를 안 써봐서..."
"0 사이는 왜 벌어져 있을까요?"
"그냥 필기체가 그런 거 아냐?"
전화번호다, 숫자 암호다. 별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갔으나 딱 그거라고 명확하게 말할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경장들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수현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숫자엔 아무런 감정도 없다. 표정도, 거짓말도 없다. 수의 체계엔 좋고 나쁨이 없다. 오직 정답과 오답, 두 가지만 있을 뿐.
수에서 숨겨진 규칙을 찾아내는 건 수현의 분야가 아니었으나 전문가는 알고 있었다. 각선배는 지금 잠 경위님이랑 같이 계시니까...
"공경장. 여기서 능력을 한번 써보는 게 어때?"
"그래, 니가 좀 머리를 써봐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또 하는 수 밖에 없죠~."
"큼큼." 가볍게 목을 풀고는 공룡은 크게 주문을 외치며 별을 있는 힘껏 들어보았다.
"수사학의 별~!"
'공룡이 머릿속의 지식을 탐구 중입니다...'
녹음이 무성한 숲과 같은 빛이 별에서 부터 쏟아져 나온다. 이어서 무의식 속 잠들어 있던 지식들이 부름에 응답하듯 하나둘 씩 머릿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룡은 망설임 없이 정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공룡은 머리가 지끈거리며, 눈앞이 아찔하고 핑 돌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공룡의 손을 라더가 재빨리 잡아챘다.
"야, 너 왜 그래?!"
"공경장님...!"
라더가 가까스로 잡아준 덕에 넘어지진 않았으나, 공룡은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되지 않아 보였다. 주변의 걱정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공룡은 창백한 안색으로 자기 능력이 건네준 자료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남은 백과λト전 능력 횟Λㅜ는 □번 입ㄴ┆다.'
'정보를 ㅈㅓ0리하는_데 실패ㅎΗΛΛ습니ㄷ┣.'
"... 뭐야 이게?"
받아 든 자료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의미 불명의 새까만 글자들의 행렬 속에서 유의미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 이게 왜 이러지...?" 공룡은 제 머리가 아픈 것보다도 처음 맞닥트린 이 상황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선배, 괜찮은 거 맞아요?"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공룡은 뒤늦게서야 알아챘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 여기 산이라서 그런가 전파가 잘 안터지네~. 다른 데서 해볼까요?"
"공경장.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수현이 강경한 태도로 되묻자, 공룡은 정곡을 찔려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멋쩍은 듯 애먼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어쩌죠. 다시 해볼까요?" 공룡의 말에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히 무리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범인이 일부러 남긴 거라면 분명 그 숫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테니, 일단은 마을 주민분들께 먼저 물어보자."
백과사전도 안 통한다니. 자리에 서 있던 모두가 큰 난관에 빠졌다. "그럼 저 숫자들을 무슨 수로 알아내냐?" 라더는 괜히 옆에 서 있던 덕개를 건들어 보았다.
"유령들은 뭐, 별말 없냐?"
"별말은 없던데..."
셋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공룡은 숫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여전히 제 자리에 서, 숫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식, 건방지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안 내놔?' 물론 그런다고 갑자기 단서가 튀어나올 일은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끝없는 호기심, 미지에 대한 갈망이었다. 모르고 넘어간다는 건 적어도 공룡 본인 사전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반드시 풀고 만다." 공룡은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그 다짐을 마음속 깊숙이 새겼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11시 10분
- 미스터리 수사반 / 마을회관 앞
"... 그래서 내가 이 마을에 몇 년을 살았는데 말야. 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하..."
이장의 수다는 강을 쭉 따라 걸어오는 동안 내내 끊이지 않았다. 사건에 대한 스트레스를 전부 말로 풀어내기로 다짐을 했는지, 자기가 이 마을에 얼마나 오래 살았고, 마을을 위해 모든 걸 바쳤으며, 마을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인지를 쉬지 않고 쏟아냈다. 아마 그대로 다 받아적었다면 짧은 단편 글 정도는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잠뜰은 옆에서 맞장구를 치느라 입가에서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수현도 중간까지는 수첩에 받아적다 그냥 경청하는 것으로 자세를 바꾸었고, 각별은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하긴 마찬가지였으나 그나마 공룡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듯 했다.
'그나저나, 전혀 실속 없는 이야기네.' 말해주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야기엔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없었다. 없는 이야기를 부풀렸다기보단, 뼈대를 전부 쳐내어 버린 느낌에 더 가까웠다.
사건과는 당연히 전혀 연관 없는 이야기뿐이고, 무엇보다 피해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듣다못해 잠뜰이 피해자에 관해서 물어봤으나, 이장은 고개를 휙 돌리며 모르는 사람이라며 딱 잡아뗐다.
마을 주민도 아닌 전혀 모르는 외부인이 시내에서 차를 타고도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이런 마을에 홀몸으로 왔다는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다. 피해자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면 범인이 데려왔거나, 피해자를 죽이고 시신을 굳이 여기까지 옮겨왔다는 소린데, 그것도 이해가 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도착했구만! 저기일세!"
그리 말하며 이장이 가리킨 곳엔, 이장의 말대로 흙색의 건물 한 채가 보였다. 다른 집들과 비교해도 훨씬 크고 모습도 확연히 달라 눈에 띄었다.
"직접 봐보게나,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 몹쓸 짓을 해놨는지."
이장은 마을회관 문 앞에 가만히 서, 자신은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잠뜰은 잠깐 문 앞에 멈춰서 마을회관의 외부를 살펴보았다.
갈색의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단조로운 건물에 붉은 기와지붕이 올려져 있다. 벽돌도 햇빛과 먼지에 색이 다 바랬지만 마을에 있는 건물 중엔 그나마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 같았다. 창문엔 전부 블라인드가 쳐져있어 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유리로 된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어두운 내부 탓에 문엔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잠뜰은 짧게 심호흡하고 마을회관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어두워..."
건물 안은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깜깜했다. 점차 어둠에 눈이 익고 내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충격적인 현장에 사람들은 전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입구부터 태풍이라도 분 듯 물건들이 죄다 어질러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엔 새빨간 웅덩이가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웅덩이 근처에 나뒹굴고 있는 쇠막대기까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시체라도 있었다면 살인사건 현장의 훌륭한 표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입구에서 우물쭈물하던 이들을 제치고 잠뜰이 가장 먼저 들어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현장으로 들어갔다. 잠뜰이 호기롭게 주변을 쓱 훑어보는 순간, 무언가 사실을 깨닫고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현장. 완전 가짜잖아?"
벽을 더듬어 보던 공룡이 조명 스위치를 발견하고 내부의 불을 켜자, 끔찍했던 사건 현장의 실체가 완벽히 드러났다.
자세히 볼 필요조차 없었다. 피라고 하기엔 너무 묽은 페인트는 벌써 굳어서 갈라지고 있었다. 물건들도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멀쩡하게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더 많았다.
수사학의 별을 쓸 필요도 없는 훤히 보이는 조잡한 속임수였다. 완전히 조작된 거짓 현장이다.
잠뜰은 바닥에 떨어진 쇠막대를 집어 들었다. 두께는 얄쌍하고 길이는 대략 50센치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한쪽 끝은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었으나, 반대편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 뭉특했다. 붉은 페인트는 뭉툭한 부분에 묻어있었다.
피해자는 복부가 찔려 사망했다. 표면적으론 이런 게 흉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각경사. 이 막대가 흉기일 가능성은 몇 퍼센트나 될까?"
"아예 없습니다. 상처의 입구가 저 막대기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리고 단면도 휠씬 거칠고."
각별은 잠뜰이 집어 든 쇠막대를 본체만체하고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그런 무딘 걸로 사람을 때려죽이면 모를까, 찔러 죽이는 건 힘들죠."
"때리는 것도 힘들어 보이긴 하는데."
잠뜰은 몸을 돌려 입구를 바라보곤, 밖에 있던 이장에게 물었다. "혹시 주변에 철물점이나, 이런 형태의 쇠막대를 취급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잠뜰이 막대를 들어 보이자, 문 밖에서 이장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거 말이지, 원래 마을회관에 있던 거라네!"
"네? 이런 쇠막대기가 왜 마을회관에 있는 겁니까?"
"블라인드를 여닫을 때 사용하는 거야!"
이장의 말대로 창문 앞으로 가보니, 그제야 잠뜰은 블라인드 우측 상단의 작은 고리가 눈에 보였다. "한쪽 끝이 갈고리처럼 되어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잠뜰은 막대를 길게 잡고는, 블라인드 고리에 갈고리를 걸고 막대를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블라인드가 천천히 열리면서 틈새로 햇살이 쏟아져나왔다.
흉기처럼 연출된 쇠막대도 그저 본래 마을회관에 있던 것을 가져다 썼을 뿐이고 살인 현장이라고 부르기엔 현장은 너무나 조악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서툴다 못해 증거투성이인 현장을 남겨놓았으나, 정작 범인을 특정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하나도 없다.
애초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해놓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피해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됐기에 현장이 멀쩡하게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그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은 대체 뭐란 말인가. 피해자가 사망했던 그 순간을 다시 재현해놓기라도 한 걸까? 여기가 살인 현장이 맞긴 한 걸까?
"이장님, 이건 뭐예요?" 어느새 안쪽까지 들어간 공룡이랑 각별은 마을회관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기계를 보고 있었다. 검은색 육면체 모양에 정체 모를 버튼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기기에서 뻗어 나온 전선 끝엔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고거는... 마을 방송할 때 쓰는 건데, 기계가 오래돼서 그런지 날씨가 습하거나 비가 오기라도 하면 작동이 잘 안돼."
"아... 그렇군요."
"써보고 싶었는데." 공룡은 아쉬운 듯 방송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각경사님이 못 고쳐요?" 내심 기대를 하며 각별에게 물었으나, 각별은 오래돼서 망가진 걸 자기가 어떻게 고치냐며 나무랐다.
"그건 그렇고, 어떤가. 수사는 잘들 돼가나?" 이장은 여전히 문 밖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선 물었다. '그럴거 그냥 들어와서 말씀하시지, 어지간히도 들어오기 싫으셨으면.' 잠뜰은 생각에 잠겼다. 나온 정보를 토대로 한번 추측해보자면...
― 사건의 재구성
〈사건파일 B. 조작된 현장〉
바닥에 뿌려진 페인트, 널브러진 물건들, 조작된 흉기. 전부 사람이 꾸며낸 거짓된 증거들이다.
피해자의 등에 사용된 붉은 페인트가 이곳에서도 발견된 점, 연달아 이런 사건들이 우연으로 일어날 일은 없는 점. 적어도 피해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인물이란 것을 고려하면,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피해자 시신 근처엔 발자국 하나 남겨놓지 않은 것에 비하면 이 현장은 너무 허술하다. 현장에 있던 쇠막대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 어질러진 부분이 입구 부분에 한정된 점을 고려해 본다면...
: 범인은 급하게 이 현장을 만들어냈다.
'... 하지만 왜 그래야 했는진 전혀 예상이 안 간단 말야.' 곱씹을수록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행동 투성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면 사건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짓으로 뒤덮인 곳엔 반드시 진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니까.
이 현장이 만들어진 그 까닭을 찾아야 한다.
다들 가짜 살인 현장을 조사하느라 바쁠 때, 수현은 혼자 마을회관에서 걸어 나왔다. 현장을 분석하는 건 동료들에게 맡겨도 충분했다.
문 밖엔 여전히 이장과 그의 손녀가 서 있었다. 이장은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듯 뾰로통한 채 마을회관 안을 기웃거렸고, 손녀는 밖으로 나온 수현을 보곤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수현은 쩔쩔매는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
"박문비씨라고 하셨죠? 혹시 최초 발견 당시의 이야기를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 헉...! 네, 당연하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지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심리 분석>
: 우리를 보고선 들떠 보이는 태도, 이장에게 어떻게 모르냐고 물어봤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입니다. 제법 유명해졌다는 우재 기자의 말이 순 가식은 아니었나 봅니다.
"뭘 말씀드리면 될까요?"
"음, 처음 현장을 발견하게 된 그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아, 네! 그러니까... 시간은 8시 좀 안돼서였던 것 같아요.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데 감자 소리가 들리길레..."
"... 잠시만요. 감자요?"
'감자? 감자가 소리 날 수 있었던 거였나?' 수첩에 받아적다 말고 수현은 손을 멈췄다. 문비는 수현의 말에 눈을 뚱그렇게 하고 쳐다보다, 이내 이해한 듯 두 손을 짝하고 마주쳤다.
"아, 감자는 저희 할아버지가 기르는 개 이름이에요! 할아버지가 감자를 좋아하셔서 이름을 감자로 지었다는데, 참 센스로 없으시지... 그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키우던 갠데 아직도 팔팔한 거 보면 할아버지가 잘 돌봐주시긴 한가 봐요. 견종은... 잘 모르겠네, 아마 포메라니안이 조금 섞이지 않았을까요...?"
맙소사. 두 조손은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정보의 범람에서 수현은 주제에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감자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 엄청 깜짝 놀랐다니까요. 소리가 들려서 밖에 나가보니 글쎄, 감자 얘가 시뻘게져서 온 거 있죠? 사실 옆구리 부분에만 페인트 같은 걸 살짝 묻히고 온 거였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엔 너무 놀라서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죠. 얘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인기척만 들리면 어디든 막 달려 나가거든요. 옛날에 논에 들어갔다가 동네 어르신들에게 엄청 혼나서 그 후로는 논밭에는 절대 얼씬도 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 수 있으니 어디 다친 데 없나 확인해보니까 다행이도 그냥 어디서 묻히고 온 거더라고요. 대체 어쩌다 묻히고 온 건지 잘 지워지지도 않아서 아침부터 씻기느라 엄청 고생했다니까요."
"... 그리고요?"
"아, 그리고 어디서 묻히고 온 걸까 궁금해져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어요. 감자는 아침만 되면 혼자서 강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빙 달리고 오거든요, 참 똑똑하죠? 그래서 저도 집에서 나와 강을 따라 죽 걷다가 마을회관 근처까지 갔는데 저 멀리 강 변두리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어요. 그래서 다가갔더니... 썩은 내가 확 풍기면서..."
문비는 피해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급 울적해졌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네... 수현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가볍게 헛기침했다.
"혹시 그때 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시나요?"
"아마 8시 30분 쯤이었을 거예요. 시체인 걸 알자마자 바로 신고를 했거든요. 마을 어른들은 해 뜨면 전부 밭일하러 나가시는 바람에 사건 현장 근처엔 저 밖에 없었고요."
지금은 6월, 한여름이다. 해는 보통 5시에,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선 조금 늦게 뜰 것을 감안해도 적어도 5시 30분이면 아침 해가 뜬다. 해가 뜨기 전에 현장을 만들었다면 일하러 나오신 어르신들이 목격했을 테니 범인은 5시 30분부터 8시 전 사이에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입니다. 문비씨는 5시 30분부터 8시 사이에는 뭘 하고 계셨나요?"
"저는... 감자가 오기 전까진 계속 할아버지 집에 혼자 있었으니까...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은 없네요. 우와, 내가 이런 말도 해보다니... 할아버지는요?"
"으응? 뭐가 말이냐?" 건물 안으로 온통 신경이 쏠려있던 이장은 그들의 대화를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요! 해 뜬 후부터 8시까지 뭐 하시고 계셨냐고요."
"뭘 하긴, 일하고 있었다! 할애비는 항상 바빠서 사람들이랑 붙어 다니기 때문에... 아까 뭐라 그랬지? 아라비아?"
"알리바이요, 할아버지."
"그래, 알리바이. 그런 건 동네 주민들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다 그말이야."
"그렇군요."
수현은 둘의 대화를 받아 적었다. 5시 30분부터 8시까지. 이장의 알리바이는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볼 것.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피해자에 대해서 아시는 점 있으신가요?"
"아뇨,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문비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모르는 눈치였다.
"어렸을 때 이 마을에 살긴 했었는데, 7년 전이였나 8년 전이였나. 갑자기 이사를 가버려서 전 이 마을에 대해선 사실 잘 몰라요. 부모님께 여쭤봐도 별 말씀해주시는 것도 없었고요. 일요일날에 할아버지 일손 도와드리려고 잠깐 내려온 거였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잠깐만요... 그럼 혹시 이장님이 말씀하신 '짐승'에 관해서도 아시는 게 없으신가요?"
"네, 전 아예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이건 좀 의왼데. 보통 산에 사는 짐승 이야기라면,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진 옛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동화 비슷한 맥락일 텐데. 비교적 최근에 생긴 말이라면 그것의 바탕이 되는 사건 비슷한 무언가가 최근에 있었다는 말 아닌가?
"그렇군요. 그럼 피해자의 몸에 적혀있던 숫자에 관해서도 전혀 짐작가는 게 없으신가요?"
"아 그거요? 글쎄요, 전화번호는 아니던데."
"... 전화 해보셨습니까?"
"호옥시 몰라서요... 확실히 무슨 암호 같긴 하죠? 누가 남긴 걸까요?"
그녀는 숫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들떠 보였다. 아무래도 암호나 미스터리,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듯 했다.
"그 숫자들, 혹시 피해자가 남긴 거 아닐까요? 다잉메세지처럼요!"
"글쎄요..."
죽어가는 피해자가 메세지를, 그것도 숫자로 암호화된 메세지를 남긴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위치도 등 뒤라는 부자연스러운 곳이고, 무엇보다 그렇게 대문짝만한 다잉메세지를 범인이 그냥 두고 보고 있을리가 없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추리물을 진짜 좋아했거든요. 제일 좋아하던 소설도 셜록홈즈 시리즈고요! 진로도 그쪽으로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결국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도 관심은 있어서 찾아보긴 해요. 그러다가 미스터리 수사반도 알게 되었고요."
문비는 다시 말문이 트인 듯 속사포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수현은 그녀의 뒤로 건물에서 나오는 자신의 동료들이 보였다. 잠뜰은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손짓하며 그를 불렀다.
"... 어릴 때 저한테 추리소설을 처음 소개해줬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말씀 감사합니다만,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다른 곳도 조사를 가야해서 이만 가봐야해서요."
"앗, 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간단하게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수현은 동료들과 다시 합류했다. 잠뜰은 마을회관 안에서 알아낸 정보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수현에게 전달했다. 수현이 다 받아적을 때까지 잠뜰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범인은 해 뜨고 나서인 5시 30분부터 8시 사이에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현장도 비슷한 시기에 꾸몄을 가능성이 크고요. 이 시간대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수고가 많았어."
"또, 이장님의 알리바이는 주민분들께 여쭤봐서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 없을지도 모르지만 '짐승'은 7,8년 전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없었다고?"
"네, 문비씨가 이 마을에 살았던 그때엔 짐승 얘기는 전혀 못 들었데요."
"알았어. 자꾸만 짐승 이야기가 계속 걸리네."
둘이 대화를 나누던 도중,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이장이 다른 누군가와 살갑게 대화하고 있었다.
"어디 산책이라도 나가시나?"
"이것들은 뭐야?"
'이것들이요?!'
'공경장, 쉿!'
"아이고, 이쪽은 우리 사건 수사하러 오신 형사님들, 그리고 이쪽은 우리 마을 최고령자, 오동벽씨라고 합니다."
그리 말하며 이장이 소개해 준 사람은 백발의 어르신이었다.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눈가가 푹 꺼져 매서워보이는 눈매를 가진 그 노인은 다리가 불편한지 두꺼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노려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좋은 답변을 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성화 관할서에서 나온 형사들입니다." 다들 반갑게 인사를 건냈으나, 노인은 형사들을 쓱 훑어보더니 고깝게 처다보고는, "쯧, 경찰 놈들이란." 그렇게 말을 내뱉고선 다시 제 갈길을 가버렸다.
"... 저희 뭐 잘못 말한 거 있나요...?" 노인의 반응을 보고 덕개가 자신이 잘못한 거라도 있을까봐 조바심을 냈다. "에이, 그냥 괴팍한 할아버지라서 그렇지, 뭐." 공룡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시작부터 밉보이다니, 이거 쉽지 않겠는데... 잠뜰은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짚었다.
수현은 그 잠깐의 순간, 노인의 얼굴에서 다른 감정을 보았다. 뭐였지? 단순한 외부인을 향한 불신이 아닌, 좀 더 개인적이 까마득할 정도로 깊숙한 무언가. 마음 같아선 수현은 잠깐이라도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 노인은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11시 52분
- 수현 경사, 라더 경장, 덕개 경장
비록 하늘엔 구름이 잔뜩 껴 흐린 날씨였으나, 여름은 여름이었다. 구름 너머로 태양은 자신이 여기 있음을 열기로 알렸고, 바깥에서 조금만 열심히 움직여도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길가의 웅덩이에 비친 하늘은 발을 디딛을 때마다 일렁거렸다. 수현과 라더는 사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들리기로 했다. 어느새 덕개도 쫄래쫄래 따라붙어 셋이 같이 이동했다.
마을회관에서부터 큰 길을 따라 걷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큰 개가 맹렬하게 짖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다.
"으와씨, 깜짝야...!" 갑작스럽게 들려온 큰 소리에 다들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소리는 근처 집 마당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잿빛의 사납게 생긴 맹견과, 개의 주인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그 개를 달래고 있었다. 여린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그 순간에도 개는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고 달려들 것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얘가 좀 낯을 가려서 그렇지 순해요, 안 물어요~."
'무서워...'
'오우, 손 한번 잘못 댔다간 손가락이 남아돌지 않겠는데?'
"진, 진짜로 안 무는 거 맞죠...?"
여인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으나 개라면 껌뻑 죽는 덕개마저 쭈뼛거리며 개한테 가까이 다가가기를 주저했다. 수현은 개와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상태를 유지한 채 여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실례합니다, 성화 관할서에서 나온 형사들입니다. 사건에 대해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어머, 그렇군요. 전 팽윤아라고 해요."
팽윤아는 40대 초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반듯한 단발머리를 어깨까지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모두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나저나, 형사님들이 개보고 그렇게 겁먹으시면 어떡해요, 애도 아니고~."
"하하..."
견주의 잘못된 대처로 인한 사건사고에 대해서 말하자면 입만 아프다. 가볍게 말할만한 일이 전혀 아니다. 사람은 말이라도 통하지, 대형견은 성인 남성도 제압하기 힘들... 아닌가? 수현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있던 라더를 바라보다, 덕개와 눈이 마주치고 라더가 눈치채기 전에 둘은 황급히 고개를 다시 돌렸다. 가능은 할 지도... 물론 그렇다 해도 유혈사태는 불가피할 것이다.
"얘는 사람이 보이면 짖나요?"
"아유, 아뇨. 그러면 다행이게요? 인기척만 들려도 막 짖어대요. 지 밥주는 사람도 3년째 못 알아보니, 원."
"그렇다면 혹시 오늘 아침에도 짖은 적이 있나요?"
"음, 아뇨. 일하러 나가서 집에 없긴 했지만, 딱히 짖는 소리는 못 들었네요."
하긴, 이렇게 큰 소리라면 농담 좀 보태서 마을 반대편에 있어도 들릴 만도 했다. 윤아의 말을 듣고 라더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아까 마을회관으로 갈 때 강가를 따라서 걷는 게 아니라 큰길로 나갔다면 개가 짖었겠네."
"그 사실을 범인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거지. 애초에 몰래 행동한다면 큰길로 나가질 않았겠지만."
"그러면 정말 범인은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맞나보네요."
덕개의 말에 둘은 조용히 끄덕였다. 범인은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오늘 아침엔 뭘 하고 계셨나요?"
"밭에서 다화랑 같이 일하고 있었죠. 아, 이장님도 뵙고요. 잠깐 기다려 봐요, 다화야! 나와봐!"
윤아가 부르자, 집에서 한 여인이 어기적 걸어 나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졸려 보이는 표정을 봐선 방금까지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자기네 집 앞에서 사람들이 쑥덕거려도 꼼짝도 안하는 구나."
"네? 여기 집주인 아니셨어요?"
"어머, 전 옆집에 살아요. 자주 여기 놀러 오긴 하지만."
자기네 집 개가 짖어도 꼼짝도 안 한다니, 여러모로 무신경한 사람이구나. 다화라고 불린 그 여인은 아직 잠이 덜 깬듯 몽롱한 얼굴로 사람들을 쓱 훑어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뭔 경찰 머리색이 저래...?"
"뭐라고요?!"
난데없이 손가락질 당한 라더가 당황해 발끈하자, 덕개와 수현이 재빨리 말렸다. 윤아도 당황했는지 친구의 실례를 허둥지둥 변명했다.
"아유 뭘 그렇게 말해, 얘가 아직 잠이 안 깼나 보네. 예쁘기만 한데 뭘. 나뭇잎 같아서 예뻐요~."
나뭇잎? 가을 단풍색보다는 활활 불타오르는 정열에 가까운 새빨간 색이긴 하지만. 하여튼 보수적인 집단에서 염색 머리가 좋게 보일리가 없긴 했다. 씩씩거리는 라더를 겨우 진정시키고 그제서야 사건과 관련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피해자에 관해서 뭐라도 아시는 점 있으신가요?"
"아뇨, 전혀요. 우리 마을 사람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피해자자의 등 뒤의 숫자에 대해서 짚이는 바는 없으신가요?"
"숫자요?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네요. 다화야 넌 알아?"
"모르지..."
"... 최근에 별 특이한 일은 없으셨고요?"
"없었는데..."
"무슨 소리야, 저번 밤에 개가 막 짖었던 적 있었잖아. 그것도 두 번이나. 자다가 깜짝 놀랐구만."
순간, 그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화가 휙하고 빠르게 고개를 돌려 험악한 눈빛으로 윤아를 노려보았다. 윤아는 놀란 눈으로 다화를 꿈뻑 쳐다보더니, 아차. 본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고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언제였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 아뇨. 별 이야기 아녜요. 제가 착각했나봐요. 정말로요. 중요한 건 아녜요."
윤아는 연신 손사래를 치며 말하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단서를 그냥 놓칠 수현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막상 보면 결정적인 단서인 경우가 다수 있거든요. 중요한지 아닌지는 저희가 판단할 일이니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도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수현은 전혀 켕기는 게 없다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윤아는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을 꺼냈다.
"언제였더라, 며칠 전이었는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밤에 개가 막 짖었던 적이 있었어요. 바로 옆집이라 똑똑히 들렸죠.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보니 누군가 집 앞을 지나가는 것 같더라고요."
"누구였죠?"
"아유, 제가 눈이 안 좋아서 자세히는 못 봤고. 담벼락 때문에 머리 부분만 봤는데, 아마..."
수현은 그 잠깐의 사이, 윤아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가더니 자신의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 스스로 의도한 행동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나온 짓일지라.
"아마, 붉은 색이었던 것 같아요."
"붉은 머리인지, 붉은 모자를 썼는지는 잘 모르시고요?"
"아유, 제가 눈이 나빠서 멀리 있는 건 잘 안보이더라고요. 거기다가 밤이라서 정확히 보이지도 않았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이었는지도 헷갈리네요~."
수현이 되묻자 그녀는 다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눈이 나쁘다는 것은 진실일 것이다. 밤에 개가 짖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닐 테고, 그렇다는건...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됐죠? 이제 그만 가주시면 안될까요?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네요."
윤아는 노골적으로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티를 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피해자에 전혀 관심도 없었으면서. 수현은 대꾸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수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다른 일이 생기시면 저희에게 꼭 말씀해주세요."
"거짓말이죠?"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라더가 수현에게 물었다. 그의 골난 얼굴을 보아 욕먹은게 여간 심통난게 아닌 듯 했다.
"음, 그저 진실을 말하는 거라면 고민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겠지."
"참나, 대체 뭘 숨기고 싶은 건지."
"... 그게 무슨 소리야?"
"응?"
난데없이 들려온 생뚱맞은 소리에 라더와 수현이 말을 멈췄다. 덕개가 무어라 말하고 있었으나 그건 그들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근소근, 분간할 수 없는 영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삐용삐용! 걸렸다! 덕개야, 너도 눈치챘지? 저 사람 거짓말하고 있었어!'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저 말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밟지 않으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도리어 쥐를 잡아버렸구나.'
'아냐,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주관적인 거짓과 객관적인 진실, 둘 다 사실입니다.'
"너네 진짜 뭐해...?"
"이젠 하다하다 지네들끼리 싸워? 대체 뭔 소리를 하는거야 너네들,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하나만 해!!" 뭐라 형용할 수조차 없는 말도 안 되는 대화에 덕개는 성이 났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엔 놀라 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조용히 해. 누가 우릴 보고 있어.'
― 누군가 우릴 보고 있다.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양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그 안에서 맥이 요동치는게 그대로 느껴진다. 시선엔 아무런 악의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쳐다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갑작스레 굳어버린 덕개를 보고 다들 걱정이 되는지 조바심을 냈다. 덕개는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거려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누... 누군가가 저희를 지켜보고 있는 거 같지 않아요?"
덕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둘을 고개를 휙하고 돌려 주변을 살폈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사람이라곤 오직 주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는 셋 뿐이다.
의심스러운 '누군가'를 찾지 못한 시선은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좌우가 아닌 상하로 돌아간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가랑비가 내릴듯 잔뜩 흐리다. 그런 흰 배경을 바탕으로 잠자리들이 약올리듯 낮게 날아다녔다.
바람이 불어오지만 시원한 산들바람 따위가 아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축축하고도 기분 나쁜, 여름의 열기에 뜨듯미지근하게 데워진 바람에 아직 설익은 벼들이 어쩔줄 모르고 뒤흔들린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뻥 뚫린 넓은 논밭 한가운데, 강 건너편 집 담벼락까지 막히지 않고 시야가 탁 트이는 시골 동네.
어디서든 맘만 먹으면 우리를 볼 수 있겠구나. 라고 조금 불쾌한 생각이 들어버렸다.
"이렇게 잘만 보이는데... 진짜 아무도 범인을 못 봤을까요?" 조금 경계가 풀렸는지 라더가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을 했다. 이곳에 가만히 멈춰 서있는다고 해결될 수수께끼는 없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미묘함을 뒤로 한 채, 셋은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괜한 기분 탓인지 나부끼는 벼들 사이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시선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3시 20분
- 수현 경사, 라더 경장
마을을 돌다 보니,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소각로 역할을 하던 드럼통과 다시 마주쳤다. 아까만큼의 화력은 아니지만 아직 남아있는 잔불들이 잿더미 사이에서 이글거렸다.
"저기 뭐라 쓰여있는 거지? ... 로벨?" 문득 드럼통에 그려져 있는 기업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로벨기업이라, 어디서 들어봤더라?" 수현은 옆에 있던 라더에게도 물어봤으나 그도 짚이는 건 없었는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공경장한테 물어봐야겠네.
드럼통이 불타던 마당의 집으로 가보니 문 앞에서 한 여인이 반갑게 형사들을 맞이했다. 자신을 김화연이라고 소개한 뒤, 몇몇 질문과 대답을 나눴으나 딱히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도대체 누가 거기다 시체를 옮겨놓았데요? 재수가 없으려고!" 화연은 마을 전체에 퍼져있는 뒤숭숭한 분위기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화 내내 뾰로통한 표정을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집에 다른 분은 안 계신가요?"
"호호, 첫째는 일 나가고 둘째는 집에 있죠. 얘, 경휘야! 형사님들 왔는데 얼굴은 비춰야지!"
라더의 질문에 화연이 소리를 지르자, 평생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뒤쪽 문이 삐그덕 하며 서서히 열리더니, 안에서 한 소녀가 나왔다. 우물쭈물하며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라더는 아이의 체형이 눈에 띄었다.
<육체 파악>
: 마르고 흰 팔이 펑퍼짐한 검은 옷과 대비되어 한층 더 야위어 보인다. 몸에는 근육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다, 또래에 비해 체구도 왜소해보이고. 방 안에서만 지내나? 저런, 운동 좀 해야겠는데.
"저기, 수경사님이 대화해보시죠." 앞에 서 있던 라더가 쭈볏거리며 수현을 앞장세웠다. "왜 그래?" 수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더를 쳐다보았다.
"그... 아시잖아요. 제가 가면 얘들이..."
"...아."
못 봐줄 얼굴이란 건 전혀 아니지만, 워낙 우악스러운 면도 있다보니, 라더는 수사할 때 정말 의도치 않게 애들을 울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잔뜩 긴장해 얼어붙은 애한테 그런 라더가 갔단 분명 역효과가 날 것이다.
"알았어. 나한테 맡겨."
수현은 자세를 낮춰, 경휘와 눈높이를 맞춰보았다. 상대방은 지금 굉장히 긴장한 상태야. 부담이 가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레 다가가야겠어,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자. 수현은 최대한 살갑게 웃어 보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안녕 경휘야. 아저씬 여기에 사건이 생겨서 온 경찰 아저씨야."
수현이 말을 끝내자마자 경휘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그러지 않아도 왜소한 몸이 더 작아 보이니, 이젠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경휘가 바로 대답을 하질 않자, 보고 있던 화연은 답답했는지 경휘를 큰 소리로 다그쳤다.
"어머, 얘 좀 봐. 경찰 아저씨가 물어보는데 대답해야지!"
"...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저희 얘가 워낙 소심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뒷말이 나오려던 걸 수현은 억지로 삼켰다. 엄마가 소리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되어 있다. 목소리는 기어갈 듯이 작고, 불안한 듯 시선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힘들면 지금은 말 안 해도 돼. 대신 수상한 사람이나, 다른 뭔가를 봤다면 꼭 경찰 아저씨한테도 말해주렴."
"... 주말 내내 집에서 오빠랑 같이 있어서... 다른 일은 잘 몰라요..."
"어머, 너네 언제부터 그리 친했다고."
화연의 말에 경휘는 대꾸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시선을 내리깔 뿐이다. 수현은 아무 말도 없는 소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보내주기로 했다.
"할 말 없으면 들어가!" 화연의 말에 경휘는 용수철마냥 튀어나가 바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대신 사과하는 화연의 말에 수현은 괜찮다며 집에서 나왔다.
"다들 시원하게 대답을 안 해주니까 수사가 영 진척이 없네요... 수경사님?"
"어? 으응, 불렀어?"
"뭔 생각 하세요?"
"..."
사실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수현은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무언가 계속해서 불안한 듯 떨고 있던 그 소녀, 다른 이들은 '소심하다'라고 함축시켜 버렸지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과 너무 유사한데...'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겁을 먹어 항상 긴장하고 있는 상태.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일지라도 자꾸 눈에 밟혔다. 내가 무언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수현은 나중에 다시 한번 이 집을 들리기로 생각했다.
그때, 집 뒤편에서 비척거리며 걸어 나오는 각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왜 거기서 나오세요?" 수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았지만, 각별은 신경도 안 쓰이는지 "수사 중"이라는 간결한 한 마디만 내뱉었다.
"이 사람이..." 뻔하다. 길을 잃었든 의도했든, 사람들 피해서 하라는 수사는 안하고 요령을 피우고 있었겠지. "아니, 농땡이 피우고 있었네 이 사람!" 라더가 좀 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수현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가만두고 있을수가 없어서 수현은 각별의 뒤로 가 양쪽 어깨를 딱 잡고 밀었다.
"안 되겠네. 저랑 가시죠 각경사님. 라경장 수고해!"
"아 예, 수고하십쇼!"
수현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고 라더는 재빨리 자리에서 빠져주었다. 그렇게 수현은 피곤해하는 각별을 데리고 탐문을 계속했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4시 05분
- 각별 경사, 수현 경사 / 이장의 집 앞
이장의 집은 마을에 있는 집 중에서도 큰 편에 속했다. 옆에 추가로 세워진 창고 덕에 그 크기도 배로 보였다. 각별은 이장의 집에 눈에 들어오자마자 무언가에 꽃힌 듯 단번에 창고의 문으로 향했다. 수현도 무슨 일인가 싶어 뒤따랐다.
"흐음, 무식하게 자물쇠를 잘라냈군. 열쇠가 문 근처에 숨겨져 있다는 걸 몰랐나 보네?"
각별은 바닥에서 쥐어 올린 작은 물체를 보기 쉽게 손바닥 위에 올렸다. 수현은 그제야 그 물체가 깔끔하게 목이 잘린 작은 자물쇠임을 알아챘다.
"쇠줄 같은 걸로 일일이 갈아냈네. 갈아내는 방식은... 오래 걸려서 발각되기도 쉽고, 이런 얇은 자물쇠는 솔직히 좀 더 뇌를 덜 쓰고 부숴서 여는 편이 간단하고 좋을 텐데. 반대로 말하면..."
각별은 자신 나름의 추리를 해보더니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엔 온갖 잡동사니들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다. 용도조차 모르겠는 둘둘 말린 전선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들. 한구석엔 녹슨 수레가 박혀있고, 요소, 석회, 질산 등 다양한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포대들과 기름통들이 즐비했다.
"이 기계들은 전부 어디에 쓰이는 걸까요?"
"응? 이건 펌프고 이건 발전기잖아."
각별은 당연하다는 듯이 몇몇 기계들을 집으며 이름을 줄줄 외웠다. 그 말에 수현은 다시 한번 기계들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전혀 모르겠는데... 안타깝게도 기계는 수현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다.
널브러진 기물들 사이에서 각별은 곧 찾고자 했던 걸 찾았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각별의 시선 끝엔 철제 선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문이 보였다. 위치상 이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보였다.
"반대로 말하면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 조용한 방식을 택했단 소리겠지. 밤에 몰래 침입하려고 했나 보군."
역시 경험은 어디 가지 않는다. 흔적만으로 당시의 상황까지 추측해냈다. 하면 잘하는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럴까?
"피해자는 표면이 거친 날붙이로 살해당했다고 했죠? 혹시 쇠줄이 흉기일까요?"
"누군가 쇠줄로 자물쇠를 따던 장면을 목격했다가, 입막음을 위해 피해자를 우발적으로 살인했다... 말은 되네."
단언은 할 수 없으나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단순히 갈린 흔적만으로 범인의 심리까지 추리하는 건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겠지만. 각별은 다른 흥미로운 것이 있을까 훑어보다, 별로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는지 뚱한 표정으로 창고 밖으로 나갔다. 수현도 주변을 살펴보다 바닥에 떨어진 작고 하얀 알갱이들 몇 개만 발견하고 각별을 따라 창고를 나왔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6시 17분
- 라더 경장
마을 탐문을 계속하던 도중, 문득 라더는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호오, 겁도 없이 나를 몰래 미행하시겠다 이거지? 하지만, 내 육감은 못 속이지.' 라더는 오히려 상대를 놀라게 할 생각으로 일단 눈치채지 못한 척 빈둥거리다 순식간에 뒤로 돌아 상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얼레?" 하지만 정말 의외의 결과에 큰소리 한번 제대로 쳐보질 못하고 입에선 맥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미행범의 정체는 웬 작은 개 한 마리였다. 갈색의 긴 털을 가지고 사람 무릎 높이에 겨우겨우 걸칠 만큼의 크기에, 작고 검은 두 눈동자를 올망졸망 빛내며 라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 요 녀석 봐라. 우리집 댕댕이보다도 작네."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혀주자 개는 신이라도 났는지 꼬리를 흔들며 라더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쓰다듬으려 손을 뻗자, 손이 채 다기도 전에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혹시 아까 우릴 쳐다보던 것도 너였냐?" 라더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이 있었으나, 그런 걸 알 턱이 없는 개는 그저 팔자 좋게 누워 사람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자 한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과 개를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익숙한 얼굴이라 잠시 생각해보니 아까 마을회관 앞에서 만났던 그 노인이었다. 성함이 뭐라고 하셨지? 기억이 안 나네. 허락도 없이 남의 개를 함부로 만져서 화가 나신 걸까? 라더가 살며시 손을 떼자, 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여전히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은 듯했다.
"여기서 키우시는 개입니까?"
"그럴리가. 난 개라면 아주 질색팔색을 해. 저기 이장놈 갠데 어릴 때부터 풀어놓고 키웠더니 아주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난리를 피워 아주. 장작 쌓아놓은 거에 오줌 싸고, 허구한 날 산에 들어가서 온몸에 흙을 묻히고 다니고, 그러면서 자꾸 집에 따라 들어오잖아. 아주 신경질 나 죽겠어!"
"아... 하하. 그러셨구나."
쌓인 것이 많은 듯 냅다 쏟아지는 불만에 라더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온 동네를 사람 따라 돌아다닌다라. "혹시 너 범인 봤니?" 속삭이듯 개한테 물어보았으나, 개는 여전히 바닥에 누워서 얼굴을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래, 니가 알 리가 없지." 마지막으로 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도 볼일은 다 끝났는지 일어서 몸을 가볍게 털곤 다시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때 무전기가 울렸다. 경위님의 회의 소집이겠군. 라더는 크게 기지개를 켜곤 터벅터벅 이장의 집으로 향했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낮 6시 23분
- 수현 경사
어쩌다 보니 선배와도 흩어지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새 다시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만개한 등나무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고 있다가, 비석을 보고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 뭐야. 여기 또 다른 길이 있는...'
"다른 길이 있었다고 했지?"
그때 당시엔 제 목숨 부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바깥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현은 본인이 지나쳐 온 도로를 되돌아가며 각별이 말했던 다른 길을 찾아보았다.
"... 철문?" 마을로 가는 길목 중간에 산으로 가는 다른 길이 육중한 철문으로 막혀있었다. 열린다면 큰 트럭도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거대한 자물쇠로 잠긴 채, 굳게 닫친 철문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었다. 철장으로 되어 있어 건너편이 보였으나 철장 사이는 좁아서 몸집이 작은 아이가 아니고서야 지나갈 순 없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철문을 잡았다가 손에 뭐가 묻어 황급히 다시 뗐다. 확인해보니 마른 진흙이었다. 누군가가 이 문을 넘어서 간 걸까? 수현은 진흙이 묻은 자리를 보며 자세를 잡아봤으나 이런 일에 익숙치가 않아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역시 몸 쓰는 일은 무리네... 무엇보다 아직 밝을 때 넘어가다 주민들에게 들켰다간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문을 조용히 열어줄 사람이나... 몰래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네. 수현은 미련이 남은 듯 괜히 철장을 흔들었다. 철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으나 열릴 기미는 없었다. 그때 무전기가 울렸다. 잠뜰의 회의 소집이었다. 연락을 받은 수현은 아쉬움은 뒤로 하고 노을을 등진 채 다시금 마을로 향했다.
―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 D-3
※ 이번편의 백과사전은 그냥 맞추지 말라고 낸거기 때문에 풀려고 전전긍긍 안하셔도 됩니다
잡다한 뒷이야기
마참내! 총 16000자라는 무시무시한 2화가 나왔습니다!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맞춤법 검사를 못했는데 오탈자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제가 실시간으로 고쳐드립니다..
오래걸린 이유가 그림때문에 좀 늦게 걸렸습니다 농담아니라 한장 그리는데 하루썼음..
배경도 못그려 사람도 못그려 그냥 그리지 말까 고민도 했었는데 그래도 이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습니까
할수 있는대로 해봐야죠ㅎㅎ
백과사전 오류난 걸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고민이 많았었는데 공식에서 양식을 줬더라고요 야호!
할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 기억나는게 없네요 에잇 기억나는거 3편에서 쓰자
3편은 다음주가 추석이라 아마 10월 초에 올릴 수 있을거 같은데
아니 이정도 속도로 언제 올해안에 완결내냐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주겠죠? 까짓것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