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에
- 이 글은 잠뜰TV의 컨텐츠 '미스터리 수사반'의 2차 창작 소설입니다. 모든 내용은 픽션이며 실제 인물, 단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 살인, 사고, 타살, 부상 등 다소 자극적이고 잔인한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첫 장편소설인 만큼 미흡한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점 너그러히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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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선
1. 전신ㆍ전화ㆍ무선 통신 따위에서, 선이 닿거나 전파가 뒤섞여 통신이 엉클어지는 일.
2. 말이나 일 따위를 서로 다르게 파악하여 혼란이 생김
3. 줄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뒤섞임. 또는 그 줄.
─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 D-3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20시 15분
- 잠뜰 경위, 각별 경사, 수현 경사, 라더 경장, 공룡 경장, 덕개 경장 / 이장의 집
산에서 간간히 들려오던 새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어둠이 짙게 드리운 이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장을 따라갔던 라더가 손에 손전등 세 개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잠뜰은 라더에게서 손전등을 받아 들고 잠시 고민하다, 다시 라더에게 하나, 그리고 덕개에게 하나, 마지막 하나는 자신이 들었다.
"어차피 밤이 늦기도 했고 주민들은 전부 자러 들어갔을 테니, 두 명씩 짝지어서 수사하기로 하자. 탐문보단 수색 쪽 능력이 더 쓰일 테니 이 셋이 손전등을 쥐기로 하고, 괜찮지?"
잠뜰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벌써 공룡은 덕개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어디로 갈지 상의하고 있었다.
"아, 맞다. 마을 입구에 있던 산으로 가는 철문 보셨나요? 넘어가 보려고 했는데 너무 높더라고요."
"어, 그럼 제가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그래, 라경장이랑 수경사가 같이 가도록. 각경사는 나랑 같이 가고."
"역시 도련님이라 담 넘는 일은 어색하신가봐요~."
"공경장..."
"그러면 다들 몸조심하고!" 헤어지기 전 잠뜰이 신신당부했다. "마을회관 근처 지나갈 때 조심하세요, 개가 짖었다간 민폐니까!" 수현이 덧붙였다. 그렇게 밤중에도 수사는 계속되었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20시 21분
- 잠뜰 경위, 각별 경사 / 마을 입구, 정자 앞
공룡이 말했던 정자의 암호를 직접 보기 위해서 그쪽으로 가던 도중, 잠뜰은 전혀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단서다...!" 마을 표지석 앞에 주차해놨던 순찰차 앞에서, 여전히 생뚱맞게 단서 하나가 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인가. 갈수록 잦아지는 빈도에 잠뜰은 이젠 기대 대신 걱정이 앞섰다.
"그럼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건가?" 각별은 흥미가 생겼는지 잠뜰에게 물었다. "그렇지? 잘 될진 모르겠는데..." 낮에 있었던 일이 잠시 현실과 오버랩되며 잠뜰의 뇌리에 스쳤다.
"앗싸, 그동안 쉬고 있어야지."
"그게 목적이였구만, 나 없는 동안 놀지 말고 수사하고 계세요."
"아,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각별이 조금 못 미더웠으나 어쨌든 달리할 수 있는 것도 없기에, 잠뜰은 순찰차 앞에서 수사학의 별을 들고 잠시 심호흡을 하다, 눈을 감았다.
잠뜰이 눈을 떴을 때, 앞에 여전히 순찰차 한대가 서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차는 어두컴컴한 시골 마을의 한구석이 아니라 성화관할서 앞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차의 색도 노란색이 아니라 다른 순찰차와 마찬가지인 흰색이었다. 각경사가 흰 차를 노란색으로 도색했었지.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났다.
다행히 건물의 문은 열려있어 잠뜰은 큰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서에 들어서자, 프론트 위의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나오며 잠뜰을 반겼다.
♬
언제나 함께해줄 너라고
변치 않을 우리의 추억을
기억해줘
♬
하지만 그 누구도 라디오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밤은 늦은지 오래지만, 건물 안은 입구부터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잠뜰은 정신없이 움직이는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또니 순경이었다. 아니, 3년 뒤의 미래니까 어쩌면 승급해서 경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니는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무어라 열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었으나, 상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사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덕개 경위였다. 덕개는 잠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걸어가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살짝 열어놓은 것을 보고 잠뜰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여긴..." 미스터리 수사반의 사무실이 있었던, 사무실이 있어야 할 이곳엔 그저 먼지 쌓인 상자들과 주인 잃은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었을 뿐이었다. 비록 다른 세계라 할지라도 근 몇 년 동안 동료들과 함께 해왔던 추억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에 잠뜰은 서글퍼졌다.
"음, 밖에 라디오에서 노래가 들리던데, 혹시 아는 노래야?" 딱딱해진 분위기를 좀 풀 생각으로 잠뜰은 가벼운 주제를 꺼냈다. 하지만 그런 잠뜰의 마음을 모르는지 덕개는 여전히 쌀쌀맞은 태도로 응했다.
"아뇨, 연예인은 잘 모릅니다. 남이 뭐 듣는지도 관심 없고요."
"아... 그렇지."
그렇구나. 덕경장이 SOS를 접한 계기는 김유진 학생 실종 사건이니까. 세상에서 자신만 혼자 동떨어진 듯한 위화감을 풀려고 했던 말인데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잠뜰이 말을 잃자, 기다리던 덕개가 먼저 본론으로 들어갔다.
"팔손리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1996년 6월 13일 밤에 일어난 산사태로, 마을 사람의 대부분이 휩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인은 장기간 내린 폭우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것으로 추측되고요."
"..."
"마을 입구부터 무너졌고, 모두가 잠든 밤에 일어난 일이라 사망자가 많았으나, 마을 전부가 쓸려나간 건 아니더군요. 마을의 외곽 부분에서 생존자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름 크게 보도된 사건이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자세한 정보도 없고, 지금 생존자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렇군... 혹시 산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마을에 특이한 일은 없었고? 살인 사건이라던가."
"사건은 없었고, 중요한진 잘 모르겠지만... 화재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화재? 방화인가?"
"아뇨, 사고... 인것 같습니다. 애초에 마을 안에서 난 것이 아니라 산 쪽에서 발생했더라고요."
"흐음..." 잠시 창고 안엔 침묵이 흘렀다. 두 경위는 각자의 방식으로 저마다 추리해 보고 있었다. 어째서 잠뜰의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 여기선 일어나지 않은 걸까,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나저나, 용케도 내가 있다는 걸 바로바로 눈치채던데, 감각들이 알려주는 거야?"
"뭐... 반은 맞습니다. 이상하게도 잠뜰님이 옆에 계시면 제... 감각들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더군요. 마치, 라디오 전파가 혼선된 것처럼 말이죠."
혼선, 혼선이라. 잠뜰은 덕개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재구성했을 때 다른 세계로 넘어오게 된 것도 혼선의 일종일까? 그렇다면 누구와?
"혼선을 대체 누가 어떻게 일으키는 걸까." 잠뜰이 중얼거렸다. 너무나 근본적인 의문이라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누군가, 어떻게 보다 중요한 게 있죠." 덕개가 말을 얹었다. 딱히 반론하려 꺼낸 말은 아닌 듯했다. 정확히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게 뭐지?" 잠뜰은 덕개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덕개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왜 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저 참고로만 생각해 주세요."
덕개가 뒷말을 덧붙였다. 감각들이 사건의 전말을 말해주니 당연히 그 이유를 찾아내는 건 오로지 덕개의 몫이 될 터였다.
"그런데, 절 볼 때마다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셔야겠습니까?"
"아, 내가 그랬어?"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게 무의식적으로 표정에 다 드러난 모양이다. 잠뜰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변명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냐, 그저... 내가 아는 세상과 미묘하게 다른 것들이 자꾸만 걸려서."
"불쾌한 골짜기군요."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미묘하게 다른 이질적인 세계. 이방인인 잠뜰이 계속해서 느끼던 불쾌감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것은 배척받기 마련이죠.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다름은 늘 배척받는다. 자조 섞인 말과 함께 덕개의 입가엔 비웃음이 번졌다. "모른다고 말할 순 없지." 잠뜰은 대답했으나 따라 웃진 않았다.
잠시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제야 잠뜰의 눈에 덕개가 들고 있던 포스터가 들어왔다. "그 포스턴 뭐지?" 창고로 들어오기 전부터 들고 있었던 것으로, 덕개는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닌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저속한 찌라시입니다. 봐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고요."
덕개가 포스터를 펼쳐서 보여주자 왜 그런 식으로 표현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2000년이 오면 세상이 멸망한다.'
연도의 천 단위가 바뀌는 중대한 순간이었다. 컴퓨터들의 시스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추고, 사이비 종교들이 휴거가 온다며 떠들어대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오가는 혼란스러운 시기임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네, 덕분에 여러모로 골치가 아픕니다."
1996년에도 가끔 나오던 이야기인데 2000년을 코앞에 둔 여기선 얼마나 말이 많을진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했다.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봐?"
"아뇨. 전혀 근거가 없는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헛소리일 뿐입니다."
덕개는 너무할 정도로 냉담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러게 말야. 다들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한 세기가 끝난다고 해서 무조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시대가 혼란스러워지면,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진 틈을 타 온갖 범죄와 악행이 판을 친다. 결국엔 세기말이라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만다.
문득, 문밖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잠뜰은 여기에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너무 시간을 뺏었네. 아까 수사할 때 도와줘서 고마웠어."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잠뜰이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니 괜찮지만, 덕개 혼자 창고 안에 오랫동안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분명 수상하게 볼 것이 뻔했다. 그리고 분명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고 있을 각별에게도 한마디 쏘아붙이러 가야 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도와줘서 고마워." 그렇게 다시 본래의 세계로 가려던 순간이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툭하고 던져진 덕개의 마지막 말이 그대로 잠뜰의 귓가에 꽃혔다.
'... 정말 멸망한들 상관없지만.'
잠뜰은 소리 내지 않으려 숨을 삼켰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닌 걸 알기에, 잠뜰은 뭐라고 말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다, 결국 마음을 접고 아무 말 없이 덕개의 곁을 떠났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20시 28분
- 수현 경사, 라더 경장 /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철문 앞
"...여기, 철문이 있더라고."
"아, 낮에 들어오면서 봤었는데."
어느새 둘은 마을 어귀에 있는 철문에 도착했다. 수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흔들어 보았으나, 여전히 굳게 닫힌 채 그 누구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었다.
열린다면 거대한 트럭도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컸으나 잠겨 있으니 무용지물이었다. 철창 사이는 좁아 수현과 라더 둘 다 사이로 지나가는 건 무리였다.
"흐음...!" 앞에서 간단하게 몸을 풀던 라더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철문에 매달려 단번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발에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철문을 척척 기어오르는 걸 보며 수현은 감탄했다. 자신은 이루지 못할 경지를 지켜보는 건 항상 경이로웠다. 어느새 꼭대기까지 올라간 라더는 곧바로 바닥을 향해 가볍게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이게, 철문이 좀 높아서 수경사님은 넘어오기 힘드실 거 같은데, 어떡할까요."
"주변엔 뭐 보이는 건 없어?"
"주변에..."
라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현이 손전등으로 비춰주기에 근처는 보였으나, 역시 멀리까지 보기엔 한계가 있었다.
"위쪽으로 계속 길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올라가 봐야 하나..."
"그러면, 혼자라도 다녀와 볼래?"
수현이 철창 사이로 들고 있던 손전등을 건네주었다. 라더는 선뜻 내키진 않았는지 잠시 머뭇하다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아... 혼자는 좀 무서운데."
"아마 상대방이 더 무서울 걸... 싫으면 안 가도 돼! 딱히 중요한 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아이, 뭐 그래도 가보긴 해야죠, 예. 그냥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라더가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어보더니 뚜벅뚜벅 묵묵히 산길을 올랐다. 손전등의 얄팍한 불빛마저 저 멀리 사라지자 수현은 이곳이 얼마나 어둡고 조용한 곳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되게... 무섭네."
방금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고요와 적막이 코앞까지 닥쳤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탓에 달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풀벌레의 울음소리마저 처량하게 들려왔다. 수현은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렇게 언제 돌아올지 모를 라더를 기다리며 수현은 조용히 철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부터 흙길을 자박자박 밟는 발소리가 마을 쪽에서 들려왔다.
"각경사님? 또 혼자 돌아다녀요?"
무의식적으로, 또 발걸음이 신중했기에 아마 각별이겠다 싶어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라 수현은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둘씩 다니자고 했던 잠뜰의 말과, 한 명뿐인 발소리와, 등불 하나 없이 숨죽이고 있던 상대가 수현의 말에 바로 걸음을 멈췄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거기 누구야!"
수현의 외침과 동시에 상대가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런...!" 뒤늦게 수현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를 전속력으로 뒤쫓았다. 이렇게 아무런 무장 없이 무방비하게 정체불명의 사람을 따라가도 되는 것인지 잠깐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기엔 이미 늦어버린 때였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20시 23분
- 각별 경사 / 마을 어귀, 표지석 앞
잠뜰이 떠난 직후, 각별은 잠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마을 표지석 앞에 주차해 놓았던 순찰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 손전등 불빛까지 꺼버리자, 주변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었다.
"어우, 이제 좀 쉬겠네." 각별은 어둠에 적응할 겸 잠깐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부터 운전한 이후 쭉 쉬지도 않고 수사에 집중하느라, 단 한 순간도 맘 놓고 앉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짧은 휴식만큼 귀중한 것도 없었다. 이놈의 인간들은 하지 말란 짓을 왜 자꾸 하는 거야, 사람 힘들게. 각별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댄 채, 이 모든 사건의 원흉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역시 살인 자체보단 메세지가 중요한 거겠지, 이렇게 힘들이면서까지 전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길래. 분명 쉴 마음으로 자릴 잡았는데 결국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각별은 다시 눈을 떴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었는지 바깥 풍경의 형체가 어스름하게 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잽싸게 마을 쪽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시야 한구석에 잡혔다. 한순간에 지나간 터라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옆의 표지석과 비교해 보니 덩치는 성인 남성쯤 되어 보였다. 우리 애들은 아니고, 이 야밤에 어딜 다녀오는 걸까나. 각별은 옆좌석에 내려놨던 손전등을 주섬주섬 챙기려다,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아... 놓쳤어... 얼굴도 못 봤는데." 뒤늦게 온 익숙한 실루엣은 지치기라도 했는지 제자리에서 고갤 숙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각별은 차에서 내려 실루엣을 향해 빛을 비췄다.
"뭐해, 토끼귀?"
갑작스러운 불빛에 수현이 화들짝 놀라다, 각별의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여기 앞으로 누가 지나가지 않았어요?" 아직도 숨이 차는 듯 떠듬떠듬 묻는 수현의 말에 각별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마을 쪽으로 달려가던데."
"아니 그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요?"
"뭐, 마을 주민이 밤산책하러 나온걸 수도 있지."
그런가. 수현은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과민 반응을 보인 건 아닌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래도, 이 야밤에 숨죽이고 몰래 돌아다니진 않겠죠." 수현이 강경한 태도로 대답했다. 하긴, 각별 앞을 그냥 지나친 이유도 설마 시동 꺼진 순찰차 안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가능성이 컸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대체 어딜 갈 생각이었을까.
"근데 너 라더는 어디 두고 혼자 돌아다니냐?"
혼자 있는 걸로는 남 말할 처지가 못 되긴 하지만, 각별이 수현에게 물었다. "라경장이요?" 수현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완전 깜빡 잊고 있었는지 눈이 땡그래졌다. 때마침 수현의 주머니에서 무전기 신호음이 들렸다.
"수경사님, 어디세요!"
"아, 라경장! 미안해, 지금 마을 정자 앞에 있어. 수상한 사람이 있어서 쫓아가느라..."
"수상한 사람이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혼자 두고 가버리는 게 어딨어요!"
내려왔더니 수현이 없어져서 라더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수현은 냅다 두고 와버린 것이 정말 미안했는지 라더에게 연신 사과했다.
"철문 너머로 갔다 왔다고? 거기 뭐 있든?"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각별이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예, 무슨 창고...? 같은 게 있더라고요. 안 쓴지는 꽤 오래된 거 같고, 문이 잠겨있기도 하고 어둡기도 해서 안에는 못 들어가 봤어요." 라더의 말로는 오랫동안 방치된 낡은 창고 같은 건물 말고는 딱히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애초에 잠겨있던 곳을 넘어가서 발견한 거라 호의적으로 나올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라경장 수고했어. 밤도 늦었으니 조사는 이쯤 하자. 이쪽으로 와." 그리 말하곤 수현은 무전을 끊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해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비가 내리기 전에 다시 이장의 집으로 돌아가자는 수현의 말에 각별도 동의했다.
○ 1996년 6월 10일 월요일, 20시 30분
- 공룡 경장, 덕개 경장 / 터널 앞
"가자 덕개야~!" 기세 좋은 목소리로 공룡이 외쳤으나 덕개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거길 왜 가요?! 이장님이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짐승 나온다고!"
"짐승? 에이, 안 나와. 진짜로!"
믿을만한 구석이라도 있는지 호언장담하는 공룡의 모습에도 덕개는 못 미더운지 쉽사리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들 앞엔 암흑에 잠긴 터널이 우뚝 서 있었다. 낮 동안은 물기 어린 꽃내음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던 공간이었으나 밤이 늦어 한 줄기의 빛조차 없으니, 끝이 없는 거대한 우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까마득한 공허 속으로 모든 게 떨어져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터널 뒤로 넘실거리는 산의 굴곡은 거대한 짐승이 엎드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 터널은 짐승의 입일까? 이 짐승이 난폭하게 삼켜버린 진실이 저 너머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걸까.
"덕개야, 손전등 들고 있으니까 니가 좀 앞장서라."
"네?! 왜요?! 오자고 한 건 공경장님이었잖아요!"
"에이, 나 같은 천재가 죽으면 경찰계에 막대한 손실인 거 몰라?"
"그럼 난 죽어도 된단 소리예요?!" 덕개는 선배가 하는 말의 대부분이 실없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항상 성질을 내고 말았다. 왁하고 소리 지르는 제 후배의 반응이 웃기기만 한지 공룡은 실실대며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덕개야, 내가 널 사지로 몰아넣겠니?"
"이미 그러고 있잖아요!"
덕개의 태클을 가볍게 뒤로하고 공룡은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읽었던 산악 책자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이 산에 사람을 해칠 만큼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짐승이 과연 있을까?
※산에 짐승이 없음을 증명하기
야생동물의 흔적
: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과 집중력, 그리고 관찰력이 있다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흔적은 발자국입니다. 발자국을 통해 동물의 크기나 걸음걸이의 특성 등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다른 흔적으로는 배설물 또는 털, 먹이 흔적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을 통해 야생동물의 생활 습성을 알아볼 수...
"아 됐어,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백과사전이 산에 사는 모든 동물의 학명을 읊기 전에 공룡은 책을 덮듯 설명을 끊었다. 일일이 대조해 볼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고 애초에 그럴만한 표본이 충분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인간에게 위협이 갈 정도라면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생물일 터인데 이 마을엔 그런 대형 동물의 흔적은 전무했다. 무엇보다 아무도 어떤 생물체인지 콕 집어 말해주지 않고 어물쩡 넘어가 버린 것이 못 미더웠다.
"백퍼 우리 못 들어가게 하려고 급조한 거라니까?"
"하지만 뭐가 있긴 있는 거 같던데... 다들 진심으로 믿고 계시는 거 같고..."
덕개가 머뭇거리는 것도 이해가 되긴 했다.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게 훨씬 어려운 문제이지만 지금은 생략하고. 맹신은 합리적인 판단에선 방해만 되는 존재다. 믿음은 증거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 명확한 물증을 회의 시간에 확보했었다.
"애초에 진짜 그런 게 있었으면 개를 풀어놓고 키우겠니?"
"아... 하긴."
"납득했지? 그럼 하나 둘 셋하면 들어가는 거다, 하나, 둘, 셋!"
하지만 신호가 끝났음에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둘은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처다보았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 일어난 해프닝에 둘은 키득거리다 누가 먼저 들어갈지 투닥거리더니, 이렇게 해선 끝나지 않을 걸 알고 타협하여 도망가지 못하게 서로를 붙잡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널의 입구에 도달하자마자 꿉꿉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눅눅한 진동이 온 사방으로 퍼졌다. 공룡이 위로 손을 뻗자, 겉으로 드러난 시멘트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간단한 조명 장치조차 없고 소형차 한 대도 겨우 지나갈 만큼의, 딱 터널의 역할만 해낼 수 있는 작고 간소한 굴이었다.
"어라...?" 무언가 발견한 덕개가 터널의 벽을 향해 빛을 비추자 단조로운 회색의 벽에 색채들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었는지 벽에는 자잘한 균열과, 그 틈새로 흐른 물 탓에 곰팡이와 이끼가 껴있었다. 그리고 그사이로 산과 나무, 꽃과 집, 사람들과 같은 꼭 아이들이 서툴게 그려놓은 낙서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물감이나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그림들은 터널이 비바람과 햇빛을 막아준 덕분에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잎의 형태를 봐선... 채송화인가, 낮에만 피는 꽃을 밤에만 볼 수 있다니." 옆에 있던 공룡의 중얼거림과 함께 또 다른 한줄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모두가 떠났으나 추억만은 제자리에서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구나.'
꺄르륵, 어째서인지 바로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살갑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덕개는 이 공간이 주는 불쾌한 위화감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뭐, 뭐라도 좀 알겠어요?" 묵직하고 축축한 공기를 겨우 깨고 덕개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먼저 말을 꺼낸 이유는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괴리감에 그대로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공룡은 여전히 그림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꽤 진지했기에 덕개는 자기도 모르게 쥐 죽은 듯 조용히 말을 삼켰다. 공룡은 고개를 돌려 후배를 보고, 천천히 입을 열더니...
"하나도 모르겠당."
...이런 말 한마디 툭 던져놓고선 쌩하고 터널 건너편으로 가버렸다.
"덕개야. 손전등 들었으면 뭐 해. 빠딱빠딱 앞장서서 앞길을 비추고 있어야지!"
"하하... 하아..."
턱하고 긴장이 풀리더니, 온몸에 맥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들려왔을지 모를 풀벌레 소리도 어이가 없는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진지해지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아니면 일부러 사건과 멀어지려고 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저 선배는 늘 막무가내였다. 수사 도중 갑자기 도시락을 까먹질 않나, 사라진 범인을 찾아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태평하게 퀴즈 풀이에 참여하질 않나. 그렇다고 그런 행동들이 아예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으니... 혹시 전부 계획한 건가? 그 정도로 영악한 사람은 아닌데. 아무튼 얄미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터널을 지나오자 다시금 물기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그나마 신선한 공기를 맡자 숨이 좀 트였다.
터널 너머는 풀과 나무들이 빽빽했다. 그래도 사람이 다니긴 하는지 풀숲 사이로 흙길이 나 있었다. "거봐, 사람 다닌다니까!" 자신의 이론이 맞다고 호언장담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좋은지 공룡은 들뜬 목소리였다.
"아 알겠다고요... 천천히 가요...!" 당장이라도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산속을 손전등의 가냘픈 빛 하나만 믿고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에 덕개는 골이 아파졌지만, 그렇다고 공룡을 혼자 둘 순 없는 노릇이라 결국 마지못해 억지로 산행에 동참했다.
산속은 찌르륵거리는 벌레 소리와 풀들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말고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날씨라도 맑았더라면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새어 내려오기라도 했을 텐데. 덕개는 지금 자신들이 이 고요한 야산의 불청객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 저기 불빛 보여, 덕개야?"
지치지도 않는지 열 걸음 남짓 씩씩하게 앞장서던 공룡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긴 해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덕개는 공룡이 흥미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높게 올라왔는지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다 담겼다. 산 한가운데가 옴싹 가라앉은 구덩이 같은 모양새에, 그 중심엔 밤이 깊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포근해 보이기도 한편으론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형태만 겨우 구별될 정도의 어둠 속에서 조그만 불빛이 꼬물거렸다. 아마 작은 손전등 하나에 몸을 맡긴 채 진실을 파헤치는 중인 동료들일지라. 저기서도 우리가 보일까? 공룡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볼까 생각하다 금방 그만두었다.
'침묵의 마을입니다.'
'하나 죽음의 구덩이로다.'
'마구잡이로 헤집어지고 썩어들어가...'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몸부림을 치지만 그 아우성엔 소리가 없습니다.'
'하나 그 끝엔 허무만이 남아있을 뿐.'
감각들도 마을을 향해 저마다의 평가를 던졌다. 덕개는 묵묵히 그 말들을 듣고만 있었다. 둘은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반딧불이가 없네." 불빛을 보고 있던 공룡이 툭하고 의문을 던졌다.
"요즘 환경오염이 심하잖아요."
"그거야 도시 얘기지. 여긴 산속이잖아."
'열심히 분리수거 해야겠네~.' 같은 시답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다, 공룡은 다시 힘이 나는지 재차 길을 따라 올라갔다. 덕개도 이젠 내려갈 생각을 단념했는지 공룡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길을 따라 걷다 반복되는 풍경에 질릴 때쯤, 우거진 나무 탓에 보이지 않았던 하늘이 저 멀리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다가가 보니 이 흙길의 끝에서 광활한 호수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진흙에 잡초들이 무성해 함부로 발을 디디기엔 위험해 보여 가까이 다가가진 않기로 했다. 비록 산에도 사람이 들어오긴 해도 이 호수까지는 잘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고기라도 있으려나 덕개에게서 손전등을 받은 공룡이 호수를 향해 빛을 비췄다. 그저 새까맣기만 한 호수의 표면에 빛이 반사되며 번쩍거렸다. "... 아무것도 안 보이네." 팔을 크게 휘저어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아도 딱히 특별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공룡이 호수에 정신이 팔린 사이, 덕개의 옆에서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곧 푸르스름한 혼 하나가 시야 한구석을 흐렸다.
'너는 이곳이 필요할 것이다. 이 고요를 반드시 머릿속에 새기거라.'
'...필요로 한다고?'
이 호수를? 공룡을 따라 덕개도 호수로 눈길을 돌렸다. 산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텅 빈 하늘을 볼 수 있는 여기에 대체 뭐가 필요하다는 건지. 잠시 덕개는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해 보았다.
비라도 오려는지 찬 바람이 물비린내를 싣고 불어왔다. 나뭇잎이 흩날리며 음산한 소리를 냈다. 공룡이 철퍽이며 호수 둘레를 따라 걷는 소리 말고는 다른 존재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어디선가 썩은 내가 나는 거 같은데."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지만 그게 호수에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인진 잘 모르겠다. 그다지 도움이 될 정보들은 아니라 판단한 덕개는 다시 눈을 뜨자, 그제야 공룡이 손전등을 들고 저 멀리 가버린 탓에 자신 혼자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혼자 두고 가는 게 어딨어요?!"
"아, 나, 난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지?!"
덕개의 아우성에 공룡은 정말 몰랐는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뒤늦게 빛이 보이는 곳으로 뛰어가니, 공룡은 웬 꽃의 군집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수국!"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국이 이제 막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올망졸망 모여있는 방울들이 줄지어 터지며 옅은 푸른 빛깔의 잎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수국 색이 원래 파란색이었나?"
야생에서 흔히 보기 힘든 새파란 색에 덕개가 의문을 가졌다. 옆에 있던 공룡이 덕개를 비웃듯 나무랐다.
"그거야 수국의 색이 변하니까 그렇지. 그것도 모르니!"
"왜 변하는데요?"
"뭐였더라... 수사학의 별!"
"결국 선배도 몰랐던 거잖아요!"
※ 공룡이 머릿 속의 지식을 탐구 중입니다...
남은 백과사전 능력 횟수는 1번 입니다.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하던 사이, 물방울 하나가 공룡의 뺨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하나둘 빗방울이 내려오더니 결국 온 사방을 뒤덮을 듯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가려주는 나무가 없으니 그대로 호수를 향해 후드둑 떨어져 수면이 출렁였다.
"뭐, 별거 없었네. 괜히 올라왔다! 내려가자, 덕개야!"
"하 진짜... ..."
공룡이 머쓱하게 웃으며 올라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저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고. 덕개는 오만 가지의 말을 겨우 삼키고 심호흡했다.
"공선배, 진짜 밤길 조심해요. 뒤에서 누가 칠지도 모르니까...."
"에이, 칠 사람이 어딨냐, 뭐 설마 여기 귀신같은 거라도 있을리가..."
공룡이 말끝을 흐렸다. 분주하게 쉬지 않고 산을 오르며 몽롱해졌던 몸이 찬 빗줄기를 맞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손전등의 불빛은 흐트러지고 시야가 흐렸다. 나무 사이사이로 새까만 어둠이 자리 잡고, 빗소리 탓에 발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지나온 이 길이 이렇게 어두웠었나? 공기가 순식간에 식고, 인지하지 못했던 공포가 목구멍에서부터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없지?"
거의 애원에 가까운 말투로 동의를 구하듯 공룡이 덕개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색이 된 덕개의 얼굴을 봐선 이미 같은 처지였다.
"맨날 귀신 보는 놈이 왜 무서워해?!"
"아니, 사람이든 귀신이든 갑자기 튀어나오면 당연히 무섭죠!!"
'다_들 어디야?!'
"으아아악?!"
"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놀라 둘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산이라 전파가 잘 안 터지는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잠뜰의 목소리는 중간중간 끊겨서 들렸다.
'도_체 어딜 가서 뭘 하_거야_?'
"아. 예, 저, 저희 곧 내려가요!"
'내려가_? 뭘 어디를_!'
"야 덕개야, 끊어끊어."
산행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룡과 덕개는 빗줄기가 더 굵어지기 전에 뭔가에 쫓기듯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 D-3
잡다한 뒷이야기
오랜만입니다 다들 잘 지내셨나요?
전 못지냈습니다 하하호호
가족 전부가 독감에 걸릴 때 저 혼자 멀쩡해서 혹시 난 만독불침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냥 잠복기가 긴 거였습니다
앓아눕고 연말 계획도 다 쫑나고 아프고 서럽고 하하호호하하
그래도 지금은 좀 낫습니다 살만해요 다들 저처럼 아프다고 인스턴트로 대충 끼니 때우지 마시고 과일 야채 비타민 많이 드세요 귤드세요 귤
하여튼 아픈 건 아픈 거고 크리스마스 전에 혼선 4편을 들고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단 완성된 그림들만이라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습니다 미완성된 그림들도 빨리 그려서 가져오겠습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1일 차의 끝과 제목인 '혼선'의 직접적인 언급이 있었습니다! 과연 '혼선'은 왜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3일 뒤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제목인 '혼선 : 꽃이 피지 않는 마을'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자세한건 스포일러니까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제 미궁보러가야징
+12.31.07:09 누락된 그림 추가, 오타 수정, 지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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