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ㅡ.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상점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코트 자락을 펄럭거리며 반겼다. 추워서 새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덕개는 길거리로 걸어 나와 군중 속으로 섞였다.
상점가엔 사람들로 북적했다. 추운 날씨 탓에 저마다 두껍게 껴입어 뒤뚱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다큐에서 본 펭귄 무리를 떠오르게 했다. 하늘은 별 하나 없이 그저 깜깜하기만 했지만, 길거리에 죽 길게 늘여진 색색의 전구들이 깜빡거리며 밤길을 밝히고, 구세군의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래된 스피커에선 맹맹한 소리로 캐럴이 나오고 있었다. 그마저도 사람들의 말소리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난 크리스마스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죠...♬
연말, 연말이었다.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쉬움 반, 설렘 반으로 세상이 들뜨는 시기였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축복하며 올 한 해도 무사히 끝났음을 알리고, 다음 한 해를 기대하는 시기였다. 연말만은 마음껏 즐기고 행복해해도 괜찮은 시기였다. 특히, 매일매일을 흉악 범죄자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란 일종의 면죄부나 다름이 없었다. 뉴스마저도 이번 크리스마스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확률 같은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사람이 풀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단 뜻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작든 크든 반드시 사건이 일어난다. 특히 이런 연말에는 경찰서엔 비상 사이렌이 울린다. 끊이지 않는 신고 전화에, 술 취한 취객들 상대에, 음주운전...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파졌다.
'... 하지만, 지금의 난 병가를 냈지.'
바로 그것이 지금 덕개가 미수반 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고,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상점가에서 홀로 걷고 있는 이유였다. 최근 며칠간 강도 높은 흉악범죄를 해결하며 심하게 고생한 탓에, 골골대는 덕개를 보고는 잠뜰이 거의 반강제로 병가 내지 연차를 쓰게 했다.
자신의 몫까지 일하고 있을 선배들을 생각하니 덕개는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뭐, 어떻게 하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쉬어서 건강해진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동료들과 수사팀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상점가로 나온 이유는, 이번 크리스마스엔 할머니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으니, 평소 잘해드리지 못한 만큼 정성과 사랑을 담은 선물을 하나 사드리기 위해 상점가로 혼자 걸어 나온 것이었다.
'방금 가게는 정말 별로였어!'
'오늘 안에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을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입니다.'
... 분명 혼자였을 것이다.
'앗! 덕개야, 방금 스웨터 괜찮지 않았어?'
'지난날, 맞잡았던 손은 얼음장과 같이 차가웠던 걸 기억하거라.'
'주위에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행을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요?'
"왜 우리 할머니 선물을 내가 아니라 니네들이 고르고 있냐고..."
덕개가 뭘 고르던 감각들이 한 마디씩 얹는지라, 지금 가게를 다섯 군데나 들렸음에도 아직도 빈손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의견 통합이 제대로 되는 게 없어서, 덕개는 앞으로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왜 내 주변에는 소란스러운 존재들밖에 없는 걸까...'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 사수를 떠올리며, 덕개는 목도리를 더 단단히 동여맸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은 많았다.
'뭐,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맘에 드는 거 하나쯤은 찾겠지.'
가만히 서있는다고 감각들이 선물을 물어다 줄 것도 아니니, 덕개는 일단 걸어가기로 했다. 그사이에도 감각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 조잘거렸다.
'어디 갑자기 하늘에서 산타가 나타나서, 선물 하나 주고 가줬으면 좋겠다...'
제 감각들이 해주는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거의 반쯤 포기상태였을 그때였다.
ㅡ 갑자기 불이 꺼지듯, 주변이 어두워졌다.
수많던 인파도, 울려 퍼지던 캐럴도, 형형색색의 전구들도 마치 빨려 들어가듯 어둠 속으로 멀어져 웅얼거렸다. 위나 아래조차 제대로 구별할 수가 없어서 더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 공기의 흐름조차 멈춰, 덕개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공허 속에서 거대한 것이 눈을 떴다. 너무나 커서 눈밖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눈밖에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새빨간 눈은 붉은 핏발을 잔뜩 세우고 분명하게 덕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덕개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눈은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더니, 도그르르 눈을 굴리더니 어느 한쪽을 바라보았다.
"뭐... 뭘 보는 거야...?"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덕개는 눈이 쳐다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엔 뒷골목으로 가는 길이 어둠으로 뒤덮어져 있었다.
한밤중임에도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사람들로 북적한 상점가와는 다르게, 뒷골목으론 재개발이 한창이었다. 말이야 재개발이지, 붉은 페인트로 적힌 '철거 중' 글씨나,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즐비한 상태로 몇 개월 동안이나 방치된 탓에 최근 들어선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뒷... 골목? 저기는 왜..."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커다란 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소란스러운 군중 소리와 화려한 상점가도 다시 돌아와, 귓가에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있는 선물들은 내겐 필요 없어요...♬
길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는 덕개를 보고 몇몇이 곁눈질을 보내왔다. 뒤늦게 그 시선들을 눈치챈 덕개는 허둥지둥 길가로 벗어났다.
"뒷골목? 저기에 뭐 볼 것이 있다고?"
난데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하는 것이라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흘끔거리는 게 다라니. 덕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소곤소곤. 제 감각들이 다시 한번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젠 너네들 차례냐. 이것들은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덕개는 투덜거리면서도, 놓치는 것 없도록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시계추가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고 있다. 단두대의 칼날같이 시간은 운명을 잘게 찢어놓는구나.'
'우연을 가장한 최악의 선물입니다. 겨우살이 장식 아래 새겨진 비통함으로 포장된 빈 선물상자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산타가 있을지도 몰라!'
'무엇이든, 저 앞은 가혹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냥 지나쳐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진실을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 겁니다.'
"......"
불안한 예감이 감돌았다. 통찰의 말대로, 다시 행복한 인파에 섞여 할머니께 드릴 선물을 고르고, 따스한 집으로 들어가 평화로운 휴가를 마저 즐기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내 아까운 시간과 힘을 들여, 저 사람 하나 없는 섬뜩한 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안 들어가겠냐고.'
어찌 되었든, 그도 형사였다. 불꽃이 꺼지면 진실을 볼 수 없다지만, 진실을 위해선 어둠 속도 들어가야 할 사람이었다.
'잠 경위님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바로 들어가셨겠지.'
덕개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화려한 번화가를 뒤로한 채,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걸어 나갔다.
한 블록도 안 되는 거리지만, 이미 오래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긴 뒷골목은 상점가와 전혀 상반된 분위기였다. 낡아서 깜빡거리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 밖으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잔해들을 가리려고 푸른 천을 둘렀으나, 그것마저 다 해져 바닥을 널부러져 있었다. 그나마 뒤에서 들려오는 캐럴만이 이곳도 현실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난 단지 당신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요...♬
ㅡ 쿵...쿵...
노랫소리 사이로, 거슬리는 소리 하나가 섞여 들어왔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이 늦은 시간에 공사라도 하는 건 아닐 텐데. 소리가 신경쓰여 덕개는 골목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을 것이란 예상과는 다르게, 골목길을 따라 쭉 걷자, 누군가 서 있었다. 폐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 도로변 한구석에서, 한 여성이 건물 앞 가로등 빛 아래에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나?'
여자는 계속해서 주의를 두리번거리다, 옷을 걷어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는 것을 반복했다. 손목을 들 때마다 무언가 반짝거리는 걸 봐서, 아마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을 것일지라.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는다고...?'
무언가 이상했다. 당장 몇 걸음만 걸어 나가도 밝고 사람 많은 번화가가 나오는데, 굳이 사람 하나 없고 볼 것도 없는 이곳에, 그것도 여자 혼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굉장히 수상했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다 덕개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가늘게 뜨고 덕개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자신이 찾던 인물이 아니란 걸 깨닫고 다시 시계로 눈을 돌렸다.
ㅡ 쿵... 쿵...
여자에게 다가갈수록, 소리는 점점 커졌다.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ㅡ 쿵... 쿵...
오른쪽? 아니, 왼쪽인가? 여기저기 고개를 기웃거리며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았으나 딱히 그렇다 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내가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건...♬
맹맹한 노랫소리가 골목길에도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덕개는 점점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도저히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이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서, 덕개는 여자의 코앞까지 걸어가 멈추었다. 여자는 다가와 멀뚱히 서 있는 덕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 뭐죠?"
"아, 아뇨. 그게... 이 소리 안 들리세요?"
"... 뭔 소리요."
"쿵쿵거리는 소리요. 뭔가가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듯한 소린데..."
"안 들리는데요."
여자는 슬쩍 뒷걸음질 치며 덕개와 거리를 두었다. 나한테만 들리는 건가, 내가 헛걸 듣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분명히도 들렸다. 왼쪽 오른쪽도, 뒤도 앞도, 아래도 아니라면, 그렇다는 건...
♬오직 당신뿐이에요.♬
'위험해!!!!!!!'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큰 굉음이 울리며 둘이 서 있던 곳 바로 뒤의 건물 창문이 깨지며, 뭔가가 떨어지기 전에, 덕개가 먼저 여자를 밀면서 같이 쓰러졌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 조각들이 두 사람을 향해 흩뿌려지며 가로등 불빛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ㅡ 퍽.
정확히 여성이 서 있었던 위치로, 무언가 떨어지면서 지면에 부딪혀 둔탁하게 깨지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났다.
"아으... 아야야..."
볼이 화끈거려 만져보니, 장갑에 붉은 선혈이 묻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유리 파편에 베인 듯했다. 나름 예민의 비명을 듣자마자 행동한 것이었는데도, 정말 아슬아슬했다.
장갑 낀 손으로 몸에 묻은 유리 조각들을 털어내며, 덕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완전히 낫지도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한 탓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괜찮으세요...?"
"......"
덕개는 주저앉아있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신... 거 맞죠?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여자는 덕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덕개 뒤로, 떨어진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혼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괜찮으신가 보네요. 어디 다치신 곳은..."
하지만 덕개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기 때문이다. 질리다 못해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짓다가 서둘러 뒤로 돌아, 뛰쳐나가 버렸다.
"에? 저, 저기요?!"
부름이 무색하게,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여자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덕개는 그렇게 여자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사람이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마디 정돈할 수 있잖아. 그냥 저렇게 감사 인사도 없이 비정하게 가버린다고?"
덕개는 여자가 사라진 곳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속상하긴 해도, 어쨌든 무사한 것 같긴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폐건물 유리창이 갑자기 터지기라도 한 거야? 도대체 뭐가 떨어진..."
'보지 말자.'
떨어진 물체를 확인하려는 덕개를 갑자기 샛노란 영혼이 나타나며 막아섰다. 놀란 덕개가 뒷걸음질 치다 무언갈 밟았다.
ㅡ 찰박.
최근에 비가 온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 골목길로 오면서 물웅덩이는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보지 말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서 여길 떠나자.'
"......"
덕개는 고개를 숙여 발밑을 쳐다보았다. 새빨간 웅덩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냥 집에 가자.'
"...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마음 같아선 그 여자처럼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도 형사였으니까.
덕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 조각들이 길거리에 흩어져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아마 머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선혈만 아니었다면 그냥 대자로 엎드려 자는 취객이라는, 조금 웃긴 풍경이라고 생각할 법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피만큼이나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복슬복슬한 상의와 하의에, 하얀 솜이 달린 붉은 모자는 근처에 나뒹굴고 있었고, 테이프로 간단하게 고정해놨던 수염이 덜렁거리며 핏기가 가신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덕개는 이 기묘한 시신을 보며,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ㅡ 하늘에서 산타클로스가 떨어졌다.
"으아, 사람 진짜 징글징글하게도 많네."
각별이 기지개를 피며, 혼잣말했다. 겨우 서류 정리에서 탈출해 바깥으로 나왔건만, 연말 분위기를 즐기기는커녕, 시체나 상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일종의 푸념이었다.
"걱정 마세요, 사건 현장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뒷골목 쪽이거든요."
"그게 더 불만이야, 이씨..."
수현의 말에도 각별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며 차에서 내렸다. 화려한 즐길 거리들을 전부 뒤로한 채 어두침침한 범죄 현장으로 제 발로 걸어가야 한다니.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으나,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기에 들어오진 못하고 겉만 돌다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각별이 익숙하게 차 트렁크에서 무전기를 꺼내고, 폴리스라인을 넘어와 수현에게 하나를 건넸다.
"여기, 경위님도요."
"아, 고마워. 각 경사."
잠뜰은 또니 순경에게 받은 초동수사보고서를 읽던 중이었다. 잠뜰은 무전기를 받아 들고 잘 작동하는지 간단하게 테스트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나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잘 작동하는 걸 확인한 후, 잠뜰은 다시 초동수사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피해자는 20대 중반의 남성, 정확한 신원은... 아직 파악 중, 사인은 추락으로 인한 두부외상, 직접적인 사인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나 손목에 멍이 듦."
보고서를 읽다 말고, 잠뜰은 자신이 본 게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이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 사망 당시 피해자는 산타 복장을 하고 있었음?"
"이야, 피해자가 산타클로스야? 이번 크리스마스엔 아무도 선물 못 받겠는데."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왜 벌써 산타 옷을 입고 있었을까요?"
"글쎄, 그건 이제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수현의 질문에 잠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겨서 다른 내용도 확인했다.
"유류품으론... 멜로디 카드? 컨셉 참... 이건 내용을 확인해봐야겠고, 최초신고자 말에 따르면... 뒷골목 쪽에서 큰 굉음이 났다고 했고, 시신 옆에 수상한 사람이 같이 발견되었음?"
"최초 목격자가 따로 있었다는 말일까요?"
"어쩌면 뭔가 중요한 걸 봤을지도 모르겠는데."
보고서에 다른 내용이 있는지 마저 확인해보고는, 잠뜰은 폴리스 라인 앞에 서 있는 또니에게 말을 걸었다.
"또 순경! 최초 목격자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은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아, 최초 목격자요? 사건 현장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마 만나면 깜짝 놀라실걸요?"
"깜짝 놀라...? 아니, 유력 용의자인데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둬도 되는 거야?"
또니는 보면 아실 거라면서 별 다른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다면 직접 보러 가는 수밖에. 잠뜰의 뒤로 수현과 각별이 함께, 캄캄한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번화가 뒤로는 그림자처럼 어두침침한 뒷골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의 발걸음은 이미 오래전에 끊긴 이 골목길엔 캐럴 소리만이 저 멀리서 작게 들려왔다.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로 깨진 유리창이 빛에 번들거렸다. 무너진 벽을 지탱하려 지지대를 세워놨으나, 그마저도 낡아 기우뚱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벽에 적혀있는 '철거 중' 글씨마저 색이 바래 있었다.
주위 풍경을 둘러보면서 잠뜰은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런 폐허엔 왜 들어온 거지? 피해자는 몰라도 그 최초 목격자란 사람 말이야."
사실 피해자 쪽도 말이 안 되긴 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상점가 쪽도 아니고, 굳이 산타 변장을 하고 이런 폐허에 들어와서 폐건물에 들어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무엇보다 혼자서? 분명 범인 또는 공범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용의자는 최초 목격자일 가능성이 컸다.
"경위님은 최초 목격자가 의심스러우신 건가요?"
"아직 대화조차 못 해봤지만,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하지만, 그 가능성은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잠뜰 스스로 닫아버리고 말았다.
사건 현장 주변에도 폴리스 라인이 빙 둘러져 있었다. 유리라도 깨진 것인지 바닥엔 파편들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현장 옆에 한 사람이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잠뜰 일행을 보자마자, 제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벌떡 일어나 격하게 손을 흔들며 셋을 반겼다.
"경위님~!"
"에엥?"
"덕 경장?!"
정말 생각지도 못 한 사람이 나타난 바람에 세 사람 모두 놀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덕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워서 새빨개진 볼에 다쳤는지 반창고를 붙이고는, 덕개는 그런 시선이 어색한 듯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터벅터벅 다가왔다.
"덕 경장, 니가 왜... 여깄냐?"
"경위님, 제가 진짜 지인짜 집에서 푸욱 쉬려고 했거든요? 근데 곧 크리스마스고 이제 연말이니까 기왕 쉬는 거 할머니께 선물도 하나 드리고 싶어서 아주 잠깐만 나왔는데요. 글쎄 감각이들 얘네가 말도 지지리 안 듣고 지들끼리만 아는 말 쑥덕거리고 그러는데, 갑자기 뒷골목으로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갔더니 웬 여성분 한 분이 계셨는데, 갑자기! 건물 창문이 깨지면서 뭐가 막 떨어지는 거 있죠! 그래서 제가 구해드렸는데 감사 인사도 없이 그냥 막 혼자 가버리는 거 있죠?! 와, 진짜 속상해서 말도 안 나오는데, 근데 뒤를 딱 돌아보니까...!"
"잠깐, 덕 경장, 잘 알겠으니까, 잠시 진정하고..."
본인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잠뜰의 물음에 덕개는 울분을 토하며 속사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점점 격해지는 감정에 잠뜰은 덕개의 말을 끊고, 잠시 분을 삭이도록 진정시켰다. 덕개는 씩씩거리다 겨우 진정했는지,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선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던 말을 마저 했다.
"뒤를 돌아보니까 사람이 쓰러져 있었어요... 그때 바로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못 했어요."
점차 목소리는 작아져, 마지막엔 겨우 들릴 듯 말 듯할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 죄송해요."
골목길엔 잠시 침묵이 내리 앉았다. 건물 너머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만들어낸 불빛이 일렁거리고, 눈치 없이 캐럴이 흥겹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냥 오늘 밤 당신이 제 곁에 있었으면 해요...♬
고개를 푹 숙인 덕개의 등을 수현이 부드럽게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무엇보다, 덕 경장, 네가 지금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걸."
수현의 말에 덕개가 두 손에 파묻은 고개를 서서히 들자, 수현은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무엇보다, 어떤 여성분을 구해드렸다며. 시민을 위해 용감하게 행동했는데,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런가요."
"그나저나, 덕 경장. 어떤 여성분을 구했다고?"
잠뜰은 둘의 대화를 곱씹어 듣는 중이었다. 손에 턱을 괸 채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언가 의심쩍은 듯 말을 꺼냈다.
"아, 네... 건물 앞에 혼자 서 계시더라고요. 누군갈 기다리는 거 같던데,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서 뭐지 하고 다가갔는데, 가까이 가니..."
말끝을 흐리고는 덕개는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엔, 반짝거리는 유리 조각 위에 엎어져 있는 비운의 산타가 있었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이 길목에 산타가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 마침 그 위치엔 재수 없게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덕개가 아니었다면 사망자가 둘이나 될 뻔한 사건이었다.
"과연 우연일까?"
"우연히 일어나는 범죄같은 건 없죠."
잠뜰의 말에 수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잠뜰은 살면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건도 반드시 그 이유와 그 까닭이 있었다.
적어도, 살인사건은 말이다.
"일단은... 그 여성을 찾는 게 우선이겠네. 그전에 현장부터 재구성해봐야겠지만."
벌써 각별은 무리에서 멀어져 먼저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앞서나간 그를 뒤늦게 발견한 수현이 제발 같이 좀 가자고 외치며 뒤따라갔다.
"나도 빨리 조사 시작해야지... 덕 경장?"
"예...?"
잠뜰의 부름에,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덕개가 딱 걸린 듯 흠칫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불안해하는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빠져나갈 구실을 찾아보려 했으나, 이미 독 안에 든 쥐였다.
"덕 경장, 어디 가나?"
"아, 저 진짜 몸이 별로 안 좋아서..."
"몸도 아프신 분이 이렇게 밤거리를 쏘아 다니시나?"
잠뜰이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자, 덕개는 애써 시선을 피해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리로 오라는 잠뜰의 말에 결국 하는 수 없이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소심한 반항의 의미로 미적거리며 시간을 끌어보았으나,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런 덕개를 놀리듯 흥겹게 캐럴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그 사람을 데려다주지 않으실래요...♬
"마음 같아선 나도 그냥 보내주고 싶지. 하지만 덕 경장, 지금 니가 유력 용의자야. 목격자 진술도 다시 세세히 검토해봐야 할 테고, 있다가 수 경사랑 면담도 해보고. 네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그 여자도 찾아야 할 텐데."
"경위님 근데 저 휴가 중인데..."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용의자 박덕개 씨?"
"알겠다구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다 결국, 덕개는 완전히 낙심하여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혹한 길이란 게 이런 거였냐고. 가로등 불빛에 모여든 날파리들이 어째서인지 처량해 보였다.
"...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무슨, 이거 완전 블랙 기업..."
"뭐? 덕 경장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현장을 향해 걸어가는 잠뜰의 뒤로 덕개도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노랫소리만이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내가 크리스마스에 바라는 건 오직 당신뿐이에요...♬
연말을 맞이해서? 심심풀이로? 써놨던 장편 느낌나는 단편입니다
다음편은 없음 안쓸거임 하하!
사실 크리스마스날 공개하려고 했었는데 크리스마스 당일 때 집에 없을 예정이라 그냥 미리 올림
혼선은 다음주에 예고편 나올 예정!